남자, 태어나다/남자, 태어나다1(back up)
고독한 11시간… 52세 '울트라 줌마'
창성
2006. 2. 13. 17:11

“특별한 목표는 없어예. 울트라 마라톤을 뛸 때면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완주할 때마다 나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넘어섰다는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 아따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마이소.”
키 160㎝, 55㎏. 노란 선글라스, 긴 생머리, 마라톤으로 다져진 다리에서 군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모자 쓰고 달릴 때는 뒤에서 총각들이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쫓아오기도 하데예. 이 나이 돼서도 듣기 싫지는 않데요. 주책이지예.”
경남 통영이 고향인 김씨는 2000년 서울로 올라온 뒤 ‘외롭고 심심해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내성적인 그가 선택한 운동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달리기였다. 그해 5월부터 중랑천변을 매일 1시간씩 달렸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아 임진각에서 열린 하프 마라톤(20㎞)에 출전했다. 그는 “겁도 없이 참가해서 끝까지 달렸는데 그날 완전히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6년 사이 풀코스 완주 50여 차례, 100㎞가 넘는 울트라 마라톤 대회도 벌써 20여 회를 완주했다.
12일 새벽 1시40분쯤 김씨는 70㎞ 지점을 달리고 있었다. 오른편으로는 검은 고성 앞바다가 펼쳐졌다. 선수들의 등에 매달려 있는 빨간 안전등과 거친 숨소리만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산을 깎아 만든 도로여서 3~4㎞씩 오르막,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난(難)코스다. 기자가 달리는 그에게 옆에서 말을 걸었다.
“잠이 와서 환장하겠네예. 뛰든 걷든, 누워서 자다가 가도 말리는 사람은 없지만 잠 온다고 앉아서 졸면 완전히 페이스 끝장납니더. 차라리 뛰면서 살짝 조는 것이 낫지예.”
김씨는 배낭에 준비해 온 비타민과 사탕을 입에 털어 넣었다. 찬바람에 꽁꽁 얼어 버린 볼을 꼬집어가며 잠과 싸웠다.
새벽 4시10분, 90㎞ 지점. 기자를 보면 환하게 웃어주던 김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무릎이 아프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 이번 대회를 뛰고 나면 발톱 2~3개가 또 빠질 것 같다”고 했다. 또 “내가 또 울트라 마라톤을 뛰면 성(姓)을 갈아버리겠다”고도 했다.
매번 대회마다 이런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험한 레이스에 참가하는 이유는 있다. 그는 “친구들은 갱년기다, 골다공증이다 하면서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병을 앓아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운동량이 부족하면 가끔 팔다리가 아프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성격도 마라톤에 빠지면서 도전적이고, 활달한 ‘뻔순이’로 바뀌더라고 했다.
95㎞ 지점. 고성 읍내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녀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남은 힘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여성부 1위 김순임씨가 트랙을 돌아 결승점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운동장 안내방송이 쩌렁쩌렁 울렸다.
12일 새벽 5시23분30초. 김씨가 결승점을 통과했다.
“헉~헉~. 아이고 데다. 이번에도 내가 1등을 했네요. 호호호”.
환호성을 울려 줄 관객은 없다. 1등을 위한 특별한 시상식도 없다. 그래도 김씨는 아이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